재일교포 2,3세가 우리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는 데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 고 하면서 이 모임에 참가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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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재일한인(재일유학생,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의 생활상태
재일조선인은 거의 대부분이 도일이전에 농업에 종사했다. 이
, 이어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두 선언이 함축하는 의미는 달랐지만 전자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을 통한 민족해방투쟁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후자는 전제주의를 이긴 민주주의의 자유, 평등사상을 등에 업고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선인을 의미한다. 개항 이전의 시기에도 일본에는 조선인이 거주하였으나 이들은 조선인으로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생활해야만 했다. 따라서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개항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항직후에는 정치가나 망명자, 유학생들이 재일조선인의 대종을 이루고 있
한인탄광노동자들이 일하기 시작하여 1932년 7월 아소상점이 경영하는 6개 탄갱(山內, 上三緖, 吉외, 綱分,赤坂, 豆田)에는 총 5,160명의 갱부가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24%인 1,070명이 한인갱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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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일제시대(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노동운동사
식민지 시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에 따라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1995년에는 최고재판소도 현행 헌법상 정주외국인(定住外國人)의 지방참정권을 인정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 이후 많은 자치단체에서 정주외국인의 지방참정권을 인정하는 의결이 이어져 왔다.............(중략)
재일동포이다. 이들은 일본에서는 외국인 취급을 받고 한국에서도 이방인으로 인식되고 있어 모국과 거주국 양쪽 모두에서 소외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재일’, ‘재일동포’,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재일코리안’, ‘뉴커머(new comer)’ ‘새로 온
사상이 요구된다.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그 식민지 지배 논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회주의적 사상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1920년대 초부터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기까지 결성된 사상단체는 청년단체 1,092, 정치단체 338, 노동단체 182, 형평단체 130을 헤아리고 있었다. 동경유학생들로부
한인사회를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독립운동 기지로 전환시켜 갔다. 1903년 이민 초기부터 하와이에서는 어느 지방에서나 10여 명 이상의 한인이 사는 곳이면 洞會를 조직하여 친목과 상호부조, 권익신장을 도모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목적의 민족운동 단체가 출현하였다. 1903년 8월 하와이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으므로 러시아혁명의 영향은 더욱 직접적인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적•계급적 억압을 당하고 있던 조선의 대중들은 당시에 러시아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러시아혁명 이후 지배와 수탈이 없어지고 생산자•무산자
한국인의 이주는 더더욱 활발해졌다. 한국에서 나는 쌀 약 1,500만 섬 중 1,000만 섬 이상을 일제가 수 탈해 가자 허덕이는 한국 농민은 개간할 황무지가 있는 만주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8 15광복으로 일제가 패망하였을 때에는 본국에 생활근거가 없는 조선인이, 조 국 귀환을 못하